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원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중에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를 미리 점령하지 못해 일본군이 승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음력 2월 21일에 전라도를 우선 점령하라는 명령서를 작성해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 장수들에게 하달했다. 14만 병력으로 편성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8월부터 우군과 좌군으로 나누어 전라도로 진격을 시작했다. 이미 7월 15일에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전라도로 수월하게 진군할 수 있었다. 우군은 총사령관 [[모리 히데모토]],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끄는 총 73,700명으로 편성되어 서생포에서 출발해 [[밀양시|밀양]], [[합천군|합천]]을 거쳐 황석산성으로 진군했다. 좌군은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로 편성되어 웅천에서 출발해 [[진주시|진주]]를 거치던 중 사천에 상륙한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수군과 합류해 총 56,000명으로 편성되어 [[구례군|구례]]를 경유해 남원으로 진군했다. 남원은 지리적으로 경상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전라도를 점령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남원에는 5월에 한양을 출발했던 부총병관 양원이 이끄는 명군 3천여 명과 접반사로 따라갔던 예조참판 정기원, 군기시에서 파견한 파진군[* 조선시대 화약장으로 화포를 가지고 선봉과 전후를 맡던 특수 부대.] 12명과 남원부사 임현 및 주민 7천여 명이 있었다. 양원은 남원읍성에 주둔하며 성벽의 성가퀴를 올리고 남원읍성 바깥에 참호를 파는 등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8월 7일 일본군은 구례현감 이희춘이 이끄는 조선군 수백명을 물리치고 구례를 점령한다. 패한 이희춘은 남원에 들어와 이 소식을 전했고 양원은 전주에 주둔한 유격 진우충과 순천에서 일본 수군을 견제하던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병력을 이끌고 남원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낸다. 8월 9일 일본군은 현재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견두산에 있는 둔산령을 넘어 여러 마을들을 파괴/약탈하며 남원읍성으로 다가갔다. 8월 10일, 양원은 남원부사 임현에게 남원성 북쪽에 있는 교룡산성에 있는 가옥들과 남원읍성 주변에 있는 가옥들을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만 급하게 소각하느라 일부 가옥들이 철거되지 못하거나 흙벽이 남아있는 가옥들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